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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올라간 사울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18-09-03 16:56
조회
104
싱가포르 나섬 한인교회 주일 설교
본분: 행11:27-31, 12:25-13:1-3

오늘 또 다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드리게 된 것을 큰 특권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지나 6월에 사도행전 11장 22절부터 26절까지를 가지고 설교를 한 후 다시 불러주시면 11장 27절부터 30절까지를 가지고 설교를 하겠다고 했는데, 너무나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것처럼 사도행전 7장 끝에 스데반이 순교하는 일이 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주로 헬라파인 흩어진 사람들이 사마리아와 다른 지역들로 가게 됩니다. 그 가운데 안디옥에 간 사람들이 이야기가 11장 19절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11:19-21)
그들이 안디옥에서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헬라인들에게 주 예수를 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년 전에 이 부분을 설교하면서 이 흩어진 사람들이 헬라인들에게‘주 예수’라고 전했다는 부분을 제가 강조했을 겁니다.“주”라는 말은 헬라어로 “퀴리오스”라는 말인데 이것은 헬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었습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같은 문화를 가진 유대인들이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가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혹은 메시아라고 전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이 흩어진 사람들이 헬라인에게 “주 예수”라고 한 것은 ‘상징 빼앗기 (symbol theft)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상징 빼앗기란 선교사들이 이교도들 사이에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의 용어나 상징물을 취해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교사들이 전하는 복음이 낯설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익숙하게 들리게 될 것입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이렇게 상징 빼앗기를 하면서 복음을 헬라인들에게 전한 결과 놀라운 안디옥 교회가 생기게 됩니다. 
(사도행전 11:22-16)
11장 22절에는 이 안디옥 교회의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보내게 됩니다. 바나바는 구브로에서 태어난 유대인 디아스포라입니다. 바나바는 자기와 함께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다소에 가서 사울을 데리고 옵니다. 사울도 역시 유대인 디아스포라입니다. 헬라어가 익숙하고 헬라 문화를 잘 아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7절부터 30절을 보면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에서 사역하는 동안 팔레스타인 지역에 기근이 들어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에 보내는데 그 때 바나바와 사울이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가는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는 원래 예루살렘 교회 교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사울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기피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사도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12장 25절을 보십시오. 이들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조를 샌드위치 구조라고 합니다. 샌드위치 구조를 아시죠? 빵이 하나 있고 그 위에 햄이나 계란 후라이, 양상추, 치즈 등을 넣은 다음 다시 빵 하나를 위에 얹는 것입니다. 그러면 11장 27절부터 예루살렘에 두 사도가 올라갔다가 12장의 여러 가지 사건이 발생한 것을 기록한 다음 12장 25절에 두 사도가 부조의 일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샌드위치 구조는 다음에 나올 사건과 샌드위치의 가운데 부분이 매우 깊은 관련이 있을 때 사용하는 기술 방식입니다. 12장 25절 다음에 나오는 절을 주목해주십시오. 사도행전 13장 1절-3절에서 안디옥 교회는 사울과 바나바를 먼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바나바는 예루살렘으로부터 검증이 된 사도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검증이 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아마도 바나바는 안디옥에서의 사울의 사역을 보았을 것이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사울이 앞으로 장차 하게 될 이방인 사역의 적임자라는 것을 알렸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 12장에 등장하는 사건들이 사울의 앞으로의 사역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합니다. 12장의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제 사도로 사역할 사울에게 아주 중요한 영적인 교훈들을 허락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때 네 가지 교훈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야고보의 죽음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2:1-2) 그것은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 헌신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언제나 평탄한 길만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inner circle이라고 할 만큼 주님과 가까이 동행한 제자입니다. 그는 제일 갈릴리에서 주님을 따랐던 제자입니다. 예수님이 게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도 가장 가까이 있던 제자입니다.

그런데 왜 야고보가 죽습니까? 헤롯의 인기 영합 때문에 죽임을 당합니다. 유대인들이 미워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무고한 야고보를 죽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기 다른 헤롯 가문의 왕이 세례 요한의 목을 벨 때와 너무나도 흡사합니다. 무고한 세례 요한을 자기 부인의 딸 살로메가 요구한다고 해서 목을 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하면 하나님께서 평탄한 길을 열어주실 것이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선교사들은 고국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선교지로 가지만 때때로 우리가 생각할 때 끔찍한 일들을 당합니다. 몇 년 전 의사였던 선교사 가족이 언어를 마치고 사역지로 가는 도중 차사고로 주님께 간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의문을 갖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런 선교사를 돌보지 않으시는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런 권리가 없습니다. 권리는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나를 따르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익숙한 신앙 환경에 처해 있어 고난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요소라고 하는 생각을 잊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말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요. 베드로 전서 2:21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25년의 사역 기간 동안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경험했습니다. 고린도 후서 11장23-28절에는 그가 겪은 고난의 목록이 나옵니다. 한 번 보실까요?
23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고난을 자기가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받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둘째는 베드로가 옥에 갇혔다가 나오는 장면입니다. (사도행전 12:3-10) 천사가 와서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오도록 돕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종종 천사를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늘 고난만 당한다면 아마 견디기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십니다. 고린도 전서 10장 13절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저는 선교사가 되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지만 후회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딱 한 번 ‘내가 선교사가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아들은 어릴 때 키가 자라지 않는 저신장증이었습니다. 중 3 때의 키가 140 센티미터를 조금 넘었습니다. 저신장증이라는 알고 어떻게 키가 자랄 수 있느냐고 의사 선생님께 물었더니 성장 호르몬을 맞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가격이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로서는 도저히 지불할 수 없는 돈이었습니다.

일 년 후에 담당 의사 선생님께 또 찾아갔습니다. 꼭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혀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 성장판이 닫히면 설령 성장 호르몬 주사를 맞아도 키가 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사 선생님이 제게 갑자기 물었습니다. “호세 아버님이 인도네시아에 계시면 선교사님이신가요?” 저는 힘없이 “예”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의사 선생님이 또 물었습니다. “그럼 주사 약값이 부담이 되시겠네요.?” 저는 다시 힘없이 대답했습니다. “네” 그러자 의사 선생님이 자기 책상 서랍을 열어서 종이 한 장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LG 복지 재단에서 소득이 없는 사람에게 무상으로 성장호르몬을 주는데 사용할 신청서였습니다. “네가 호세 아버님이 오실 줄 알고 이 신청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청일이 며칠 지나서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전화를 해보겠습니다.”복지 재단에서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고 약을 무상으로 주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아들은 일년가 주사를 맞았고, 키가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연약함을 아시고 천사를 보내셨다고 믿습니다.

셋째는 기도의 중요성입니다. 12장 5절과 12절에 나오는 기도라는 단어는 우리가 하는 사역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사역은 우리의 사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고, 예수님 자신이 늘 기도에 힘쓰는 분이었습니다.

어떤 성도님들은 기도를 잘 못 알고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뜻을 위해 하나님의 팔을 비트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우리의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주님의 뜻이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의 모습을 기억하시죠? 내 뜻이라면 십자가를 거부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뜻이라면 감당하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실망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일하면 그저 우리가 일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이런 사실을 안 선진들이 있습니다. 1908년에 제임스 프레이저라는 젊은이가 중국내지 선교회를 통해 운남성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는 런던 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했고, 당시 영국에서 피아노를 가장 잘 치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모두 두고 중국 운남성으로 가서 리수족이라는 부족을 섬겼습니다. 리수족은 운남성과 미얀마 국경을 이루는 노강이라고 하는 곳에 살았는데, 그들이 성경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22살의 청년은 그들이 사는 해발 2000미터가 넘는 산악지대에 들어가 살며 리수 언어로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 결과 리수족은 현재 80만 명인데, 70%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제임스 프레이저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자 어머니에게 매일 기도해 달라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어머니는 같은 동네에 사는 그리스도인들과 매일 점심식사 시간에 모여 제임스 프레이저와 리수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제임스 프레이저가 동네 길을 걷고 있을 때 자신을 그토록 핍박하던 사람이 와서 갑자기 “선생님, 예수님을 믿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이런 것을 잘 아는 프레이저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처음에는 첫째는 기도요, 둘째는 훈련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첫째는 기도요, 둘째도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넷째는 교회를 핍박하던 헤롯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충이 먹어 죽었지만 성경은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2:20-23
20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21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22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23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우리는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절대로 절대로 피조물들에게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2장 8절입니다.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한 군데만 더 보겠습니다. 이사야 48장 11절입니다.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사역을 하다가 인정받지 못해서 실망하고 돌아서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인정받는 것은 나중에 하나님께서 해주십니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영광을 받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조심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그 사역의 마지막까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썼다고 하는 디모데 후서 4장 16-18절을 보겠습니다.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7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18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것은 비참한 보고서입니다. 사역 초기에 자기를 따랐던 사람들이 모두 떠난 불쌍하 사역자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자기가 성공적인 사역자로 인정을 받느냐 아니냐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느냐 아니냐에 달려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들을 목도하고 12장 마지막에서 바나바와 사울이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바나바와 동일한 자격으로 이방인들의 선교를 향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영적 교훈이 사도 바울만을 위해서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도 기록하셨다고 믿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에도 이렇게 하나님 안에서 훈련되어 하나님의 크신 사역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