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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장례식 3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20-07-01 23:37
조회
49
기록을 찾아보면 어딘가 나올 것으로 생각되지만 내가 하와이에 도착한 날짜는 6월 20일 어간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나는 하와이에 도착하면 아버지의 임종을 곧 보게 될 것이고, 3일 상을 치루고 나면 6월 27일이나 28일에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의 장례를 모두 마치고 6월 27일까지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학기말 고사를 마치자마자 시작하는 세무대학 기독학생회 수양회에 참석하고 싶어서였다.

1986년부터 세무대학 기독학생회는 부흥이 일어났다. 학생들은 성경을 공부하고 싶어했고 방학이 되면 바로 40명, 50명의 학생들이 수양회에 가서 말씀을 공부했다.

나는 학생들과 성경을 공부하는 시간이 정말 좋았다. 1988년 여름 수양회에도 그래서 꼭 참석하고 싶었다. 물론 이번 수양회의 강사는 이미 정해놓았다. 친구인 주성호 목사가 말씀을 인도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학생들과 함께 시간을 꼭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장례식이 빨리 끝나는대로 돌아가리라 생각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인생이 어디 생각한대로 되는 법이 있는가.

아버지는 돌아가시지 않으셨다. 나는 아버지 옆에서 계속 성경도 읽어드리고, 찬양도 들려드렸다.

하와이에는 어머니도 계셨고, 누나도 있었고, 두 남 동생이 있었다. 하지만 누나와 동생들은 매일 가게를 나가서 일을해야 했고, 어머니도 아버지 간병에 지쳐서 아버지는 주로 내가 돌봐드려야 했다.

위암 세포가 위를 막아서 음식물이 십이지장으로 내려가시 못해 아버지는 강제로 금식을 하셔야 했다. 하지만 무언가를 드시고 싶어하시는 아버지에게 무조건 아무것도 못드시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약간의 음식을 드리면 아버지는 그곳을 모두 토해내셨다. 토하시는 아버지도 힘드시고, 그것을 모두 치워야 하는 나도 힘들었다.

육체적으로 힘드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는 한 한국으로 돌아가시지 못한다.

가끔씩 아버지의 맥을 잡아보는데, 맥은 건강하셨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버렸다.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셨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정말 죄송했다. 하지만 수양회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도 여전했다.

6월 26일이 되었을 때 한국으로 돌아가 수양회에 참석하겠다는 희망은 포기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버지의 혀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에게 속삭이셨다.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겨우 알아들었다.

"누나 좀 불러줘!"

얼른 가게로 전화를 해서 누나를 불렀다.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것 같은 것을 직감한 누나가 급히 달려왔다.

누나를 보자 아버지는 겨우 말을 하셨다.

"니 덕분에 잘 살았다."

누나는 나를 대신해서 가정의애서가장 큰 역할을 했다. 하외이에 와서 아버지는 누나 덕에 편히 사신 것이 사실이다.

누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펑펑 울었다.

조금 후에 아빠는 다시 거의 굳은 혀로 말씀하셨다.

"엄마 좀 불러줘"

어머니가 오셨을 때 아빠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여보, 미안해. 속 많이 썩여서."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데굴데굴 굴며 우셨다. 누나도 울었다. 나도 울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들이 쉬시고 뱃지 않으셨다.

아저지의 얼굴은 평안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