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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뿌리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21-03-05 10:41
조회
144
(2월 23일에 있었던 아세안미션 이사회의 경건의 시간에 나눈 말씀을 조금 보완한 글입니다. )

사역자로 산 지 30년이 지났습니다. 가장 고민하는 것은 나는 과연 영적인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인격을 영성이라고 부른다면 내게는 과연 영성이 있는 가라는 질문입니다. 소리를 크게 내어 기도하는 것이 영적인 것처럼 보이고, 경건한 모양으로 팔을 올리고 찬양을 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제 경험으로 영성은 그럴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망가질 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아마 사무엘하에 등장하는 다윗의 모습은 가장 망가진 상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왕좌를 노리는 자기 친아들을 피해서 도망을 가고 있습니다. 이것처럼 비참한 일이 또 있을까요? 그런데 그런 비참한 다윗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시무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다윗을 저주합니다. 시무이는 사울의 친척이니 그럴 만도 하겠지요.

사울을 따르던 장수 가운데 아비새가 있습니다. 그가 다윗에게 말합니다. 저 인간을 쫓아가 죽이고 오겠습니다. 저 같았으면 속이 시원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전혀 다르게 대답합니다. 그냥 놓아두라는 것입니다. 그가 하는 저주가 하나님이 하라고 한 것이라면 내가 어찌 막을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혹시 그가 자신에게 퍼붓는 저주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게 될 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을 유진 피터슨이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아비새는 의의 뿌리가 없이 의의 편에 서려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주변에서 많이 보지 않습니까? 다윗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비참함도 아니고 시무이의 저주도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남북전쟁 때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했다는 말을 기억합니다. "My greatest concern is not whether God is on my side of not, but whether I am in his side or not" 내가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 편인가 아닌가가 아니고 내가 하나님의 편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라는 링컨의 말이 과연 우리가 늘 하는 질문인가 하는 점입니다.

OMF 대표로 있으면서 선교 후보자들을 만나면서 이런 사람들을 정말 많이 보았습니다. 시작은 하나님으로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런 곳으로 부르셨다느니,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서 환상을 보여주셨다느니 합니다. 그러나 후보 프로세스가 진행되는 동안 그 하나님은 거의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정말 인간적인 방법으로 선교지로 가려고 애를 씁니다. 선교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마치 어느 순간 하나님을 떼어 놓고 뭔가를 하는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잘 아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첫 텀에 별로 성공적인 경험을 하지 못하고 본국 사역을 하고 다시 선교지로 돌아가려고 할 때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선교사가 제게 “선교사님, 저는 오기로라도 사역을 할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정말 우울했습니다. 역시 그 선교사에 대한 소식을 그리 유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망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하나님이 더욱 빛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영성이 아닌가요.

영적인 리더로 알려진 허드슨 테일러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토론토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헨리 프로스트라고 하는 사람이 허드슨 테일러를 모시고 기차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읽은 조간 신문에 어떤 기자가 전날 선교집회에서 허드슨 테일러가 한 설교를 형편없는 설교였다고 비난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는 그 기사를 허드슨 테일러가 읽지 않았으면 했는데, 허드슨 테일러는 이미 그 기사를 읽은 뒤였습니다.
헨리 프로스트가 그 사실을 알고 미안한 표정으로 그 기자가 뭘 잘 모르는 기자라고 이야기 하자. 허드슨 테일러는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저 같이 부족한 사람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놀라곤 합니다.” 헨리 프로스트는 허드슨 테일러의 겸손에 놀라 이렇게 글을 썼다고 합니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위대한 척 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위대한 사람이 사소한 사람처럼 되려고 하기는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허드슨 테일러의 겸손은 오직 예수님의 낮아지심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경지다.”

헨리 프로스트가 허드슨 테일러가 보여준 겸손을 예수님의 겸손이라고 표현한 것은 매우 적절해 보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겸손하니 내게 와서 배우라. 얼마나 반어법적입니까. 영어로 oximoran이라고 하는데, 전형적인 예처럼 보이죠. 자기에게 와서 배우라는 사람을 겸손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정말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겸손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겸손과 다른 것은 아닐까요? 헬라어로 타페이노스라고 하는 이 겸손을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너덜너덜해진 천 조각 같은 상태, 파산한 상태 등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나는 이제 망가져서 누구도 나처럼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그런 것을 내게서 배우세요.”라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에는 그런 메시야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아무도 흠모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싫다고 얼굴을 돌리는, 그것이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게 바로 영성의 뿌리죠. 기독교는 언제부터 그런 영성은 내다버리고 화려한 건물과 화려한 의복과 화려한 신학에 도취되어 버렸습니다. 목사라고 부르는 것에는 양이 차지 않아서 박사라는 학위를 가져야만 하고, 대형교회의 목사들의 목에는 힘이 들어가고, 자신이 40일 금식 세 번 했다고 쓰고 다니는 사람, 옥한음 목사님에게서 직접 제자훈련 받았다고 만날 때마다 말하는 사람,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기 명함에 “1,500명 교회 장로”라고 써가지고 다니는 것도 보았습니다. 겸손의 영성을 찾기 어려운 곳에는 아비새처럼 의의 뿌리는 없이 의의 편에 서겠다는 사람들만 득실거리는 기독교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교지도 그렇게 되어 가는 것을 많이 봅니다.

어느 목사님인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 “한국 기독교 영성의 보루는 선교사다.”라고 한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두려운 말이지요. 그런데 선교사들에게서 마저도 영성을 찾을 수 없다면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저는 아시안 미션이 잘 하고 계시지만 이런 영성이 있는 선교사들을 찾고 후원하면 좋겠습니다. 망가지고 망가져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선교사, 그런 분들이 우리 기독교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