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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던 사람들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18-09-05 06:12
조회
295
본문 행11;22-26
제목: 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사람들

이번에 제가 싱가포르를 방문하게 된 것은 OMF 국제본부에서 지난 월요일부터 열린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입니다. 재작년 선교대회에서 말씀 전하고 돌아갈 때 박 목사님께서 싱가포르에 올릴 있으면 알려달라고 해서 연락을 드렸는데, 마침 서울에 가시게 되었다면 주일 설교를 부탁하셔서 여러분들 앞에 다시 서게 되었습니다.
오를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안디옥에서 생긴 일입니다. 그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오늘 본문 앞에 기록된 사도행전 11장 19절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년 전 제가 주일 예배 설교할 때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한 것을 기억하는 분이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난주에 교회에 와서 들었는데, 제 설교를 들은 분의 40%는 다른 곳으로 가셨고, 40%는 들었어도 다 잊어버렸을 거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간단히 다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11장 19절은 스데반의 순교로 시작된 핍박으로 인해서 흩어진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에 와서 말씀을 전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19절에 보면 흩어진 사람들이 같은 동족인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다가 20절에 보면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그 결과 안디옥에 유대인과 헬라인으로 구성된 교회가 생긴 것입니다. 19절부터 21절까지를 읽겠습니다.

19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이제 22절을 보니까 그 사실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습니다. 왜 예루살렘 교회에 많은 사도들이 있었는데, 당시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도 않은 바나바를 보냈을까요. 사도행전 8잘 14절을 보면서 비교를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4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전 북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멸시를 당했지만, 자신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조상이 야곱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인 베드로와 요한이 가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안디옥에 있는 헬라인들이 있는 교회는 매우 다릅니다. 베드로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지만 할례를 받았고, 율법을 지켰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베드로가 어떤 사람인지 잘 나와있습니다. 고넬료라고 하는 로마 백부장이 초청했을 때 마지못해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베드로를 보내시기 위해 정말 애를 많이 쓰셨어요. 환상을 보여주고 잡아먹으라고 세 번이나 한 끝에 베드로가 드디어 고넬료의 집에 갔습니다. 10장 28절에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어떻게 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나옵니다. 상반절만 한 번 같이 읽어볼까요?

28a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자신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이방인의 집에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안디옥에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이방인들을 볼 때마다 “원래는 제가 이렇게 만나면 안 되는데요.” 하고 인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어떤 사람입니까? 사도행전 4장 36절에 약간의 힌트가 있습니다. 그는 구부로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구부로는 바로 터키 반도 아래에 있는 큰 섬입니다. 키프러스라고 하고 영어식으로는 싸이프러스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교포라는 뜻이지요. 그러니 헬라어를 잘 했을 것이고 헬라문화를 잘 이해하고 헬라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큰 부담이 없었을 것입니다.
11장 23절은 바나바가 어떤 사람이었나를 더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때 은혜를 영어로는 그레이스 (grace)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카리스’라고 합니다. 카리스라는 말은 원래 우아함, 품격, 혹은 이성에게서 느끼는 멋, 이런 뜻이 있습니다. 영어로 graceful 하면 멋지다 우아하다라는 뜻이고, disgrace하면 망신이 됩니다. 아마도 베드로가 안디옥에 갔다면 그런 멋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나바의 눈에는 할례도 받지 않고 율법도 모르는 헬라인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모습이 그렇게 멋지게 보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사의 눈입니다.
우리 단체는 원래 허드슨 테일러라고 하는 분이 시작한 중국내지 선교회였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영국을 떠나 배로 5개월 정도 항해해서 중국 상해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단체 선교사들은 모두 내지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얼마 안 돼서 중국 내지인 운남성, 사천성, 청해성, 신장 등에 갈 수 있지만 당시에는 걸어가거나 노새를 타고 몇 달을 가야했습니다. 중국 내지 선교회 선교사 가운데, 제임스 아담이라고 하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 말로는 묘족, 중국식 발음으로는 마오족이라고 하는 부족에게 말씀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그가 몇 달 고생을 하고 드디어 마오족 마을에 가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숙소에 돌아와 이렇게 일기에 적었습니다. ‘나는 오늘 드디어 하늘 아래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았다.“ 아마 관광객들이나 등산객들이 우연히 마오족을 만났다면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교사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고 안디옥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성도들이 더 늘어났습니다. 그러자 그는 터키 반도 남쪽에 있는 다소에 가서 사울을 데리고 왔습니다. 사울은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교포입니다. 그러니 헬라어를 잘 하고 헬라 문화를 잘 이해하고 헬라 사람들을 대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 둘이 안디옥에서 말씀을 가르쳤고, 사람들이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처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런 배경을 통해서 안디옥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특징을 세 가지 정도 살펴보고 싶습니다.

1. 이질적인 배경을 갖고 있었지만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우리가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헬라인들과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들이 함께 어울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의아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둘 사이에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데, 하나가 된 모습 속에서 유대인이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헬라인이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통점을 보고 그렇게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교회를 다니다가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새로 이사한 동네에 교회가 너무 많아 어느 교회를 가야할지 모르고 있는데, 하루는 동네 미장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미용사가 물었습니다. “새로 이사 오셨나봐요. 혹시 교회 다니세요?” 그래서 대답을 했습니다. “네, 전에 살던 동네에서 교회에 나갔는데, 새로 이사를 오니 어느 교회를 다녀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러자 미용사가 말했습니다. “저 쪽 길 모퉁이에 있는 교회를 다니세요.” 그래서 물었습니다. 그 교회 교인이세요? 아니요. 저는 교회 안 다녀요. 절에 다녀요. 그런데 왜 그 교회에 저보고 나가라고 하세요. 이 동네 교회가 많아요. 그런데 머리하러 오는 교인들이 자기 교회 욕을 많이 해요. 목사가 어떻다는 둥, 장로가 어떻다는 둥, 같은 집사하고 싸워서 안 나간다는 둥, 그런데 저 모퉁이 교회 다니는 교인들은요 한 번도 자기 교회 욕을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어요.“
“서로 사랑하라. 그래야 모든 사람이 너희를 내 제자라고 알 것이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은 강력한 말씀입니다. 이것을 뒤집어 이야기 하면 너희가 사랑하지 않으면 내 제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연코 이야기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교회라고 해도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교회는 싸우면서 제자훈련을 합니다. 제자 훈련을 해서 제자가 된다고 말한 성경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제자라고 알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헬라인들이 유대인들을 어떻게 대했고, 유대인들이 헬라인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안다면 우리는 안디옥에서 일어난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에 보니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의 성도들에게 한 일은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무엇을 가르쳤을까요? 성경이었습니다. 가장 선교적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공부하는 교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공부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는 것이 선교임을 밝히 알게 됩니다. 주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과 한 일이 무엇입니까. 성경공부였습니다. 누가복음 24장을 한 번 볼까요.

25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요즘 많은 성도들이 성경을 별로 읽지 않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가톨릭 신부님이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에 대해서 한 가지 지적을 해달라고 하자. 그 분이 말했습니다. “요즘 개신교도들은 성경을 안 읽더군요.” 우리가 왜 가톨릭을 박차고 나왔습니까. 성경을 읽기 위해서였습니다. 초대교회 때에 성도들은 성경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꼬란에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책의 사람들, 즉 성경의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성경의 말씀을 풀어 이해시켜주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32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그렇습니다. 성경을 공부할 때 우리가 뜨거워집니다. 그래서 그 뜨거운 가슴으로 교회를 섬기기도 하고, 선교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하지 않으면 냉냉해집니다. 냉냉하면 봉사를 해도, 선교를 해도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성경공부의 요점이 무엇인가요? 46절과 47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46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교에 대해서 모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성경을 선교적으로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를 한 번 읽어보실까요. 66장을 보십시오. 아주 분명하지 않습니까.

18내가 그들의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
19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징조를 세워서 그들 가운데에서 도피한 자를 여러 나라 곧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및 두발과 야완과 또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뭇 나라에 전파하리라

성경은 이렇게 분명하게 선교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님들이 이 말씀이 선교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번 8월에 나섬 교회에서 퍼스펙티브 훈련이 있는 것 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는 관점이 확 바뀔 것입니다. 저도 이번에 강사로 다시 올 겁니다.

3.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렸습니다.

11장 27절부터 보게 되면 유대 지역에 기근이 들어 고생하는 이야기를 듣고 안디옥 교회가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 교회에 보냅니다. 요즘 선교와는 정반대로 하고 있지요. 선교지에서 본국 교회로 돈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돈이 파송한 나라 교회에서 선교지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선교사들은 자기 교회로부터 돈을 가지고 간 것이 아니라 자기 교회로 돈을 가지고 왔습니다.
13장 1절부터 3절에 보면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지로 보냈다고 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누구입니까. 이들은 안디옥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은 분명이 이들을 교사라고 말하고 있고, 11장에도 와서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선교는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담임 목사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선교사님, 교회에서 말썽부리는 부목사가 있어요. 선교지로 보내버리려고 합니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선교지는 귀향살이 하러 가는 곳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를 드릴 때 가장 귀한 동물을 잡아 드렸습니다. 흠도 없고 점도 없는 동물을 드렸습니다. 못 먹을 것, 팔지 못할 양이나 소를 드리면 큰 일 났습니다. 남는 것으로 드린 것이 아닙니다.
선교지에 선교사가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넘쳐납니다. 어떤 선교지에서는 선교사를 그만 보내라고 아우성입니다. 그러나 정말 훌륭한 선교사는 부족합니다. 어디나 훌륭한 사역자가 부족합니다. 자카르타에서 한 여자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그 분이 한국에 있을 때 강남에 있는 사랑의 교회를 다녔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를 매주 듣던 분이니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가 별로라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옥 목사님께 전화를 해서 좋은 부 목사님을 한 분 보내주시면 그 분을 모시고 개척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옥 목사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저 아무개 집사닙니다. 부 목사님 중에 말씀 잘 전하고 기도 열심히 하시고 전도 잘 하시고, 제자 훈련 잘 하는 분 한 분만 보내주세요. 제가 도와서 자카르타에서 좋은 교회 하나 개척하려고 합니다.” 말씀을 다 들은 옥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집사님, 그런 사람 있으면 내게 보내줘요. 나도 필요해.” 말씀 잘 가르치는 지도자는 언제나 필요합니다. 하지만 가장 좋은 사역자와 성도를 선교지에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실천한 사람들이 바로 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사람들입니다.

맺는 말

교회를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사람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축구를 하는 모임을 만들면 그것도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했습니다.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는 부모들의 모임도 에클레시아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사실 처음 교회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제도로서의 교회보다는 특정의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따라서 처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사람들의 특징을 알아보는 것은 초기 교회의 특징을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주로 유대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지만 여전히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안디옥에서 주님을 믿은 사람들은 할례도 받지 않고 율법을 지키지도 않는 사람들이었으니 어쩌면 유대인이 아닌 우리와 더 가까운 사람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매우 선교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저는 나섬 교회가 선교적 교회가 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살펴본 세 가지 특징이 더 와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디옥 교회, 그들은 배경이 완전히 달랐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힘써 지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삶에 실천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성경을 선교적으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선교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이것이 우리 나섬 교회 안에서도 계속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