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에 나타난 선교의 두 가지 모델

사도행전에 나타난 선교의 두 가지 모델

사도행전에 나타난 선교의 두 가지 모델 23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16-10-28 23:54
조회
47
● 담을 쌓지 않는 사람들

고난이 주는 의미 가운데 하나는 우리 가운데 만들어진 어떤 담도 허물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중국 형제와 현지인 형제들의 관계

죠이 사역이 한창 진행되던 1998년 소요사태 때문에 모두가 어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들어 하던 학생들은 중국계 학생들이었습니다. 치안공백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중국계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불을 지르고 중국계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가게에 가서 약탈을 했습니다. 수디만이라고 하는 형제는 어머니가 어디로 가셨는지 모른다며 울었습니다.

그 주에 화요기도모임이 있던 날에 나는 죠이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한 지체라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우리가 오늘 밤 끌려가서 죽는다면 옆에 있는 형제에게 어떻게 하겠느냐 물었습니다.

그러자 형제들은 평소에 자기가 소원하다고 생각하던 형제자매들에게 가서 모두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저 혼자 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아름다운 광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죠이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 중국 교회 지도자의 편지



중국 교회들도 공산혁명이 성공하기 전에 사분오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산당들이 교회의 지도자들을 노동개조소에 보내면서 그 담이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교리와 사소한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고난을 당한다고 하는 사실 앞에서 안개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전에는 개신교 목사와 가톨릭 신부는 서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노동 개조소 안에서 목사와 신부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형제로 만났습니다.



어떤 목사가 외부에 몰래 써서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써 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개신교 목사와 가톨릭 신부) 여기서 벽돌을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담을 쌓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성도들 안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한 지체라고 느끼는 본능이 있습니다. 톰 신부님과의 아름다운 교제를 통해서 필자 자신도 오직 예수 안에서 함께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교단의 정치와 신학적 예리함이 우리와 다른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서슬 아래서 우리는 감히 선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헬라인들을 향한 유대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처음부터 조각조각 나고 말았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