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서 웃고 계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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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건이의 스케이트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17-01-30 08:59
조회
255
1-1. 건이의 스케이트

내가 고등학교 3학년에 다니던 1973년에는 봉천동으로 가는 버스 노선이 별로 없었다. 상도동에 위치한 숭실대학교 근처의 로터리가 버스 종점이었다. 상도동에서 같은 학교를 함께 통학하던 우익이네는 상도동 로터리의 버스 종점을 조금 지나 봉천동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있었고, 우리집은 버스 종점 조금 못 미치는 곳, 숭실대학교 후문 쪽 언덕에 있었다. 당시는 통행금지가 있는 때라 12시가 되면 누구도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11시경에는 종점에서 출발하는 차들은 없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길가의 상점들도 대부분 이미 문을 닫아 거리는 컴컴했고 12월의 날씨는 춥고 음산했다.
우익이네 집에서 나와 우리집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데 내 발걸음은 천근 같았고 머릿속에는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우선 건이 엄마에게는 무어라고 할까. 심지어 우리 가족들에게도 책임 없는 사람처럼 비춰지는 것이 걱정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얼마 전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리스도인이 이런 실없는 짓을 했다고 생각하니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날 사건의 발단은 이렇게 시작 되었다.

내가 중학생일 때까지 우리는 남의 집에서 세를 살았다. 우리가 세 들어 살던 집에는 다른 가구도 함께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이 건이여서 우리는 그 집을 건이네라고 불렀다. 건이네는 경상도 분들이었다. 서울서 살다가 건이 아버지가 퇴직을 하자 결국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분들의 고향이 정확히 어딘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경상도 어디였을 것이다.
예전에는 세를 사는 사람들은 모두 한 가족처럼 지냈다. 하기사 벽이 얇아 옆방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다 들릴 정도니 모르고 지내는 것이 더 불편했을 것이다. 건이네도 우리와는 가족처럼 지냈다. 음식을 하면 서로 나누어 먹고, 아이들도 서로 돌봐주었다.
건이 엄마가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오면 가끔 우리 집에서 머물기도 했다. 주님을 믿고 얼마 되지 않아 건이 엄마가 우리집을 찾았다. 건이가 이제 학교를 다니는데 스케이트를 사가지고 가고 싶다는 것이다. 문제는 돈이 넉넉지 않아 새 스케이트를 살 수가 없어 중고를 사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임무가 내게 주어졌다.
나는 당시 신설동에 있는 대광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학교까지 가는 버스가 청계천을 지났다. 당시 청계천은 지금의 모습과는 매우 달랐다. 청계천은 콩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덮었고, 그 위로 경제 발전을 상징하는 고가 도로가 있어 우중충한 분위기였는데, 그 아래로 공구 상가, 중고품 가게들이 줄을 이어 있었다.
새 스케이트를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체육용품을 파는 가게에 가서 정가대로 구입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중고는 새 것처럼 정해진 가격을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서 건이 엄마가 준 4천원을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서면서 주님께 기도했다. 주님 오늘 건이 중고 스케이트를 사야하는 데 가격과 품질이 좋은 것을 고를 수 있도록 인도해주세요. 하고.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바로 청계천으로 가 중고 스케이트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다른 변수가 하나 생겼다.
이과반에서 의대를 준비하며 공부하던 우익이가 문과반에서 공부하는 나를 찾아왔다. 그날 저녁에 한빛 모임이 있는데 올해로 마지막 모임이라고 했다. 그리고 많은 회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시작한 한빛이라는 써클에는 서울 고등학교, 경기여고, 이화여고, 숙명여고, 그리고 내가 다니던 대광고등학교 이렇게 다섯 학교 학생이 모여서 농촌 봉사도 가고 시국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써클이었다.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 나는 한빛이라는 써클에서 무척 활동적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나서 이전에 하던 많은 사회적 활동을 그만 둔 상태여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을 것이다. 그날 저녁 모임은 단순히 그 해의 마지막 모임이 아니라 내가 고등학생으로서의 참석하는 마지막 모임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