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선교

문화와 선교

문화와 선교 18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16-10-28 23:32
조회
86
● 사라의 바사바시



인도네시아에서 만나는 가장 커다란 문화 충격은 소위 바사바시라는 것이다. 바사바시라는 말은 우리말로 번역하는 예의상 하는 말이다. 물론 인도네시아에 처음 도착할 때는 바사바시를 이해하지 못해서 당황도 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를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중에 한 사건이 발생했다.



1996년 6월 어느 날, 가자마다 대학에 다니는 사라가 긴히 할 말이 있다며 죠이 사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무슨 말을 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앉아 있는 내게 사라가 입을 열었다.

“빡 손, 어제 제가 한국에 가는 문제를 아버지와 의논했는데, 아버지가 그러면 졸업논문은 언제 끝낼 거냐고 물으셨어요. 아버지 말을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이번 여름에 한국을 다녀오면 논문 쓰는데 지장이 있을 것 같아 한국 가는 것을 포기해야할 것 같아요.”



사라는 1996년 8월 한국에서 열리는 선교한국 대회에 참석할 세 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되어 한국 방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 사라가 한국에 가기 힘들다고 했을 때만 해도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나 하고 생각했지만 가만히 이유를 들어보니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별 생각 없이 사라에게 물었다.

“논문 때문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되네. 그러면 사라 대신 누가 한국에 가면 좋겠어?”

사라는 얼른 ‘오삔’이라는 자매가 대신 가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오삔은 누구보다도 한국에 가고 싶어 했다.



어떤 면에서 그는 한국에 갈 자격이 있었다. 한국에 갈 회원을 선발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전체 다섯 명의 형제자매들 가운데 오삔은 두 번째로 높은 점수를 받은 사라 다음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형제인 ‘위윗’이 오삔보다 점수는 낮지만 남녀가 적당한 비율로 한국에 가는 것이 좋겠다는 기준에 따라서 위윗이 가게 된 것이다. 오삔은 자신이 그런 이유로 선발에서 탈락하여 한국에 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못내 아쉬워했었다.



사라가 있는 자리에서 나는 오삔에게 바로 전화를 했다. 나는 그에게 사라가 논문 때문에 이번 여름에 한국을 가기 어려운데 대신 갈 수 있냐고 물었다. 오삔은 기다렸다는 듯이 갈 수 있다고 대답했다. 전화로 나와 이야기하는 동안 그는 좋아서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오삔과 전화 통화가 끝나자 사라는 내게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나는 그것으로 문제가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죠이 사무실에서 임원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였다. 이미 꽤 늦은 시간이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죠이 임원으로 섬기는 형제에게서 온 전화였다. 그 시간에 전화한 걸로 봐서 분명히 다급한 일인 것 같았다. 이미 임원회에서 충분히 논의하고 막 돌아왔기에 일상적인 문제라면 이런 시각에 급하게 전화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