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라비안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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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라비안 나이트 13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16-10-28 22:52
조회
50
취임식



다위와 호세가 집에 있는 동안 있었던 중요한 일 중 하나는 한국 OMF 대표 취임식을 거행하는 것이었다. 취임식이라는 것이 너무 거창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한국 OMF가 어려운 시기를 지나왔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에서 그리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취임식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또한 대표로서 취임식을 한다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대표를 하겠다고 하고 나서 일 년의 말미를 얻었다. 계획대로라면 2001년 7월부터 한국으로 와서 대표 일을 해야 했다. 전임 대표의 임기는 2000년 6월말로 끝나게 되었다. 그 일 년의 동백을 메우는 것이 큰 문제였다. 사실은 몇 가지 가능성을 두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상황이 더 나빠졌다. 국제본부에서는 내가 또 다른 부탁을 했다. 이왕 일 년 뒤에 대표를 할 것이면 2000년 7월 1일부로 대표를 맡아달라고 하는 것이다. 뭐 이왕 하기로 한 것인데 그야 어떠랴 하고 어떨결에 대답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대표를 맡게 된 첫날 열어 본 대표 이메일 박스에는 수 십 개의 편지가 있었는데, 하나 같이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게다가 나는 인도네시아를 떠날 수 없었다. 3개월에 한 번 한국에 와서 일주일을 머물면서 문제들을 해결했다. 그렇게 한국대표로서 6개월을 보내고 나서 내린 결론은 내가 이 일에 적절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내와 의논한 후 우리는 정중하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가 지난 6개월 동안 최선을 다해서 일을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한계를 느낍니다. 한국 OMF의 차기 대표로 다른 사람을 뽑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국제본부에서는 2001년 6월말에 두 명의 부총재가 마침 한국에 갈 생각이니 그 때 만나자는 것이었다. 긴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리고 다시 대표를 맡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2001년 11월 초 국화 향기가 가득한 늦은 가을 날 드디어 취임식을 하게 되었다. 이제 결혼식을 올린 부부가 쉽게 헤어지지 못하는 것처럼 취임식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더 이상 대표에 적절하다 하지 않다고 하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효과가 있었다.



대표 취임식을 며칠 남겨두고 대표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내가 한 사역들은 그런대로 할 일이 분명했다. 인도네시아에서의 사역만 해도 조이 사역은 해마다 부흥을 경험했지만 여전히 족자에 있는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 일을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과 전략을 가지고 하면 되었다. 또 한국에서 세무대학교수로 있으면서 캠퍼스 사역의 경험을 나름대로 쌓을 수 있었다. 세무대학 교수로서 캠퍼스 사역을 하게 된 것은 대학생 때 이미 JOY 선교회에서 배운 것들, 그리고 남현 교회에서 중고등부 교사로서 나름의 사역을 감당한 것이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OMF 대표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분명치가 않았다. 지역 교회의 목사도 아니고 회사의 사장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고, 학생 사역자도 아니고,,,행정을 하는 공무원도 아니고...



그러던 어느 날 내 고민의 답을 얻게 된 계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