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라비안 나이트

쏘라비안 나이트

쏘라비안 나이트 2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16-10-28 22:49
조회
43
1장 자카르타 오딧세이



자카르타의 꾸닝안에 있는 까레푸르 매장에서 장을 보다가 나는 갑자기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수퍼에서 이것저것을 골라 카트에서 넣다가 파를 집었을 때 내가 왜 수퍼에 왔는지 생각이 났던 것이다. 집에서 라면을 끓이려고 하다가 파가 없어서 파만 얼른 사러 수퍼마켓에 왔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라면을 끓이기 위해서 냄비에 물을 넣고 가스 레인지의 불을 켜놓은 채로 왔다는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수퍼마켓에 온 김에 매장의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사기 시작했다.



시간이 제법 흘렀다. 파를 집어 드는 순간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는 생각이 났다. 머릿속에 내가 물을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왔다는 것이 생각나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그 시간이면 500cc밖에 안 되는 물은 벌써 다 졸았을 것이다. 그리고 냄비는 다 탔을 것이다. 그리고 불은 벽으로 옮겨 붙기 시작했을 것이다.



미친 듯이 사람들 틈을 뚫고 계산대로 갔다. 종종 걸음으로 순서를 기다렸다가 계산을 하고 출입구 쪽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좀처럼 뛰지 않는다. 두 종류의 사람만 뛰는데, 한 종류는 도둑이고, 또 다른 종류는 도둑을 잡으러 가는 사람이다. 나는 그 둘 중 아무 것도 아니지만 지금은 도둑이냐 아니냐를 가릴 계제가 아니다. 출입구에 있는 쭉 늘어서 오젝 가운데 가장 앞에 있는 오젝에 올라탔다.



꾸닝안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나는 단지 쪽으로 가면서 우리 아파트 쪽에서 연기가 나는 지를 살폈다. 혹시 소방차가 싸이렌 소리를 내고 오지는 않나 귀를 기울였다. 내 손에 들고 있는 쇼핑 봉투는 거의 아무런 감각 없이 손에 달려있었다. 사실 그 봉지를 내던지고 오는 것이 나았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그런 것을 붙들고 가는 내가 한심해보였다.



아파트로 들어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그날따라 엘리베이터는 더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았다. 드디어 방 앞에 도착했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집안이 매케한 냄새와 연기로 덮여 있었다.



이미 물은 바짝 졸은 냄비가 빨갛게 달구어져서 조금만 더 있었다면 벽으로 불이 옮겨 붙을 기세였다. 수돗물을 틀어서 냄비에 붓자 수증기가 주방과 아파트 전체로 가득하다. 냄비를 얼른 싱크대에 넣고 물을 틀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제 상황 끝이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긴 숨을 내쉬고 나자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나기 시작한다.



바닥에 앉은 김에 나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집 안에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은 쌀라티가의 학교 기숙사에 있었다. 아내는 서울에 가있었다. 상황이 조금 안정되자 갑자기 내 처지가 불쌍하게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 없이 며칠을 자카르타에서 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해방감도 있고, 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냄비를 레인지에 올려놓고 장을 보다가 불을 낼 것 같은 상황을 지내면서 왜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012년 9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