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라비안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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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라비안 나이트 82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16-10-28 23:19
조회
52
(오늘부터 쏘라비안 나이트의 마지막 부분인 4부를 쓰게 됩니다. 처음에는 반추하는 실천가라는 제목으로 쓰고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꿈이 이루어지다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모두 다섯 가지를 쓰게 되는데, 그곳이 어떤 형태로든 꿈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1부는 인도네시아에서 마치고 한국으로 와서 정착하는 내용, 2부에서는 한국 OMF를 세우기 위한 노력, 3부는 좌절과 실패, 그리고 4부에서는 ;꿈들이 이루어져 가는 것, 이렇게 구상이 될 것같습니다.)



14장: 피그트리의 꿈



새로운 꿈



2001년부터 족자 사역을 마치고 비록 OMF의 대표를 맡기 위해서 한국에 돌아와 있었지만 인도네시아 조이에 대한 부담은 여전했다. 고린도 후서 11장을 보면 아마도 사도 바울의 마음이 그렇지 않았을까.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헐벗었노라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서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11:24-28)“



위 글을 읽으면 사도 바울의 사역 기간 동안 그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당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주목하고 싶은 것은 맨 마지막 부분이다. 사도 바울이 교회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자신의 부담이야 말로 그를 힘들게 하는 가장 큰 어려움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고 있다. 내게 있어서 한국 OMF 사역 못지않게 큰 부담으로 남아 있는 사역은 인도네시아 조이 사역이었다.



1992년 몇 명의 대학생으로 시작된 조이. 하나님의 은혜로 족자의 많은 대학생들이 주님을 알고 그의 제자로 성장하면서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작은 인원의 대학생들이 영어로 성경을 배우는 모임으로 시작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대학생들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금요일 저녁마다 창의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표현해냈다.



조이의 학생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끼와 성의를 다해서 매스 미팅을 준비했다. 따라서 조이 모임을 위해서는 250명에서 때로는 4,5백 명이 모일 수 있는 장소와 무대가 필요 했다. 즉 매주 학생들이 모여서 워십 댄스, 연극, 찬양 등을 하기 위해서는 무대가 있는 큰 강당이 전제되어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1997년부터 몇 년 동안 족자의 유서 깊은 육군 박물관 강당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곳은 1945년부터 1950년 사이에 있었던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의 전쟁 시절 임시 정부가 자카르타에서 족자카르타로 이전해 오면서 국군 사령부로 사용되었던 곳이었다. 따라서 늘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일종의 국가 시설이었다.



하지만 비가 오면 천정이 세고 전기가 나가기도 하고, 에어콘이 없어 500명 정도가 모여서 성탄절이나 부활절 행사를 하려면 찜통이 무색할 정도였다. 이런 여건인데도 조이 학생들은 매주 모임을 즐거운 가운데서 해나갔다. 그런 모임을 뒤로 두고 한국으로 와서 OMF의 대표를 하면서도 마음은 늘 족자의 필요에 있었다. 하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고작 기도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2009년부터인가 육군 박물관 강당을 드디어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학생들은 그 많은 짐들을 끌고 아주 작은 강당으로 옮겨갔다. 그곳은 더 열악하고 좁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사역도 조금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