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라비안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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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라비안 나이트 62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16-10-28 23:15
조회
61
11장: 사역의 기쁨과 고통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너는 누구냐?’고 물었을 때 자기가 누구라고 딱히 말하기 어려웠던 것 같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그렇게 물을 때마다 언제나 자기를 그저 ‘광야의 외치는 소리’라고 말했다. 나는 물론 세례 요한도 아니고, 그에게 견줄 사람이 못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사람들이 때때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헷갈려 하는 것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손창남 선교사는 누군가?" 라고 하는 질문을 12년 전에 했다면 나는 주저 하지 않고 학생 사역자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면 12년이 지난 지금 나는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오엠에프 대표는 임기가 있는 직책이지 사역자의 정체성은 아니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나를 학생사역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선교지에 나가기 전에도 내가 교수라는 생각보다 캠퍼스에서 사역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캠퍼스 사역이야말로 내가 가장 좋아 하는 일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나를 선교사라든지, 교수라든지 하고 부르는 것보다, 어떤 사람이 나를 학생 사역자라고 불러 줄 때 가장 기뻤다.



누가 나에게 가장 행복했던 사역 기간이 언제였냐고 한다면 세무대학에서 학생들과 성경을 함께 공부하며 지냈던 시절, 그리고 다시 인도네시아에서 학생들과 함께 보냈던 그 시절이다. 그리고 지금도 늘 그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그러니 나 자신이 나에 대해서 학생사역자라고 말 할 만하지 않는가.



2006년 5월 족자에서 만난 지진 속에서 하나님이 보여준 것은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한 대답이었다. 한국 OMF 대표 일을 감당하면서 배운 것이 많다. 아니 어쩌면 대표가 아닌 자리에서는 도저히 배울 수 없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불러주셨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진 속에 죽어가고 있는 영혼들을 떠올리는 순간 OMF 대표 일 말고 내가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게 분명하게 말해 주신 것은 지진을 통해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OMF 대표 일을 계속해야 하나를 놓고 갈등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아세아 연합신학대학교에서 기독교 상담을 공부하는 아내가 교수님들이 추천했다면서 노트북 (notebook)이라고 하는 영화를 보자고 했다. 상가에 있는 비디오 방에 가서 DVD를 빌려 왔다.



약간 야한 장면들을 제외하면 그런대로 볼 만한 영화였다. 야한 장면도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대학에 다니는 우리 아이들이 함께 보다가 엄마 아빠 보면 좋지 않다면서 그 부분에 오면 리모트 콘으로 다 처리를 해 주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