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선교

문화와 선교

문화와 선교 68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16-10-28 23:44
조회
74
● 원로 회의에서

인도네시아 대학에서는 모든 교수가 참석하는 평교수 회의는 없지만 총장, 부총장, 각 대학의 학장 그리고 박사 학위 소지자들로 구성된 원로회의 (Rapat Senat)라고 하는 것이 있다. 나는 경영학 박사 소지자라는 이유로 원로 회의 회원으로 회의에 초청을 받아 참석했다. 원로회의는 대학교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결정을 하는 기관이었다.



경상대학 교수회의에서 학장이 나에게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한 후 얼마 있지 않아 원로 교수회의가 있었다.



그날 원로 교수회의에서는 얼마 전 선출된 총장 예정자가 부총장들을 미리 선임하여 원로교수 회의석상에서 인준을 받는 아젠다가 있었다. 그 자리에 대학교 재단 이사장도 와 있었다. 재단 이사장은 원로교수회의 정식 회원은 아니었다. 이사장이 참석한 데에는 모종의 의도가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이사장은 총장 예정자가 부총장 예정자를 발표하려는 순간 브레이크를 걸었다. 총장 예정자의 지위가 아직 부총장 예정자를 발표할 자격이 없다는 궤변을 내놓았다. (사실 재단 이사장은 누가 부총장에 임명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이를 저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총장 예정자는 발표하려고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종이를 다시 접었다.



논리적이 아닌 재단 이사장의 궤변에 원로회의에 참석한 누구도 이의를 다는 사람이 없었다. 나도 침묵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면 회의는 곧 종료될 것이고 부총장의 발표는 총장이 정식으로 취임된 뒤로 밀려날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넘어 가면 진리가 묻혀 버릴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재단 이사장에게 총장 예정자는 정당한 절차를 밟고 있다고 설득했다. 재단 이사장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말만 되풀이했다. 나는 지지 않고 이사장의 논리를 반박했다. 이사장도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렇게 그 재단 이사장과 설전을 하며 반시간이 지났다.



인도네시아 교수 중에서 우리의 설전에 끼어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적진에서 싸우고 있는지 아군 진영에서 싸우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계속 설전을 벌여나갔다. 내가 그렇게 용기를 가지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경상대학 학장이 용기를 불어넣어주었기 때문이었다.



꽤 시간이 흐른 다음 다른 외국 교수 한 명이 변호사 출신인 부총장에게 법 논리상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부총장은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 교수가 옳습니다"

그러자 다른 교수들이 그러면 부총장 선임을 지금 당장 발표해야 한다고 거들었다.



회의가 끝나고 회의장 문을 나서는데 경상대 학장이 다시 내게 다가와서 엄지손가락을 위로 세우며 말했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