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선교

문화와 선교

문화와 선교 69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16-10-28 23:44
조회
74
● 동일화의 한계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아무리 동일화 하는 노력을 한다고 해도 한계는 있다.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는다면 현지인이 가지는 지위는 절대로 주어지지 않는다.



어떤 선교사가 남미의 페루에서 사역했다. 어느 날 비가 몹시 내리는데 먼길을 여행하다가 밤이 늦어 여인숙에 들렀다. 그는 현지인과 똑 같은 우비를 입고 여인숙으로 들어갔다. 여인숙 안은 불이 매우 희미해서 선교사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인숙 주인은 그 선교사를 외국에서 사용하는 호칭인 미스터 하고 불렀다.



선교사는 깜짝 놀랐다. 여인숙 주인이 자기 얼굴을 알아볼 수 도 없었고 자기가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국인 특유의 억양도 듣기 전에 어떻게 자기가 외국인인 것을 알았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자기가 외국인인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주인은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하더니 다시 문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와 보라고 부탁을 했다. 선교사가 문을 열고 다시 들어오자 주인이 외쳤다.

“아, 알겠네요. 당신의 걸음걸이다 이곳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그렇다 심지어 걸음걸이까지 우리는 흉내 낼 수는 없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인도네시아 대학에서 가르칠 때 가장 많이 듣는 학생들의 질문은 내가 축구 선수였었냐는 것이다. 나를 만나본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축구를 잘 하지도 못하고 축구 선수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하루는 궁금해서 왜 나를 보면 축구 선수 같다는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학생들은 내가 캠퍼스에서 걸어 다닐 때 빨리 걷는다는 것이다.



맞다. 나는 어릴 때부터 빨리 걸어 다녔다. 어릴 때 무협만화를 보면서 나도 어떻게 하면 축지법을 해볼 까 하는 것이 내 간절한 소원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빨리 걸어다녔다.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빨리 걸어 다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눈에 띠지 않는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는 사람들이 대부분 천천히 걷는다. 그래서 캠퍼스에서 내가 빨리 걸어다닐 때 학생들은 내 걸음걸이를 주목했던 것이다.



또 한 번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느낀 순간이 있었다. 4년의 사역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족자를 떠나 자카르타에 며칠을 머물면서 리더와 평가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사이에 주일이 있어서 아주 모처럼만에 한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나는 그 동안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친해져서 인도네시아 말로 말씀을 듣고 인도네시아 말로 찬양을 불러도 충분히 은혜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날 한인교회에서 우리말로 찬양을 부르는 순간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아, 내가 못말릴 한국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이 선교지를 방문하고 돌아와 이렇게 말한다.

“그 선교사님은 현지인보다 더 현지인 같다.”

그것은 그저 우리들끼리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