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에 나타난 선교의 두 가지 모델

사도행전에 나타난 선교의 두 가지 모델

사도행전에 나타난 선교의 두 가지 모델 88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16-10-29 00:09
조회
88
12. 바울의 미션



● 사도 바울의 사역의 독특성



앞에서 사도 바울의 사역을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세 번의 예루살렘 방문을 중심으로 썼기 때문에 충분하다고 생각지 못하는 분들도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2부에서 이야기 한 흩어진 사람들로 인해서 이루어진 풀뿌리 선교 사역과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선교 사역이 충분히 대비가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조금 이야기가 주제를 넘어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분들이 사도 바울이 선교사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고개를 약간 갸우뚱 합니다. 우선 선교사 우리가 사용하는 ‘미셔너리(missionary)’라는 말은 순수한 한국말이 아니라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한 말이지요. 그 missionary라고 하는 단어는 라틴어의 ‘미시오(misio)’라고 하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라틴어 미시오라는 단어는 언제부터 사용되었나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7세기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와 같은 곳을 점령하기 위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땅을 정보하고 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나라에서 가톨릭 사제들을 그곳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미시오라고 불렀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영화 미션 (The Mission)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1986년에 상영된 바 있는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바로 미시오였던 것입니다. 예수회 신부들은 파라과이 지역에 있는 과라니 족의 마을에 들어가 선교사역을 합니다. 처음에는 원주민들의 경계 때문에 힘들어 하지만 이들은 신부들의 순수함을 깨닫고 이들로부터 신앙뿐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와 상업적인 이유로 원주민들의 정착촌은 결국 초토화 되고 신부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는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가브리엘이라고 하는 신부가 폭포를 향해 올라가는 이야기로 시작을 합니다. 백인들에 대해서 호전적인 원주민들이 가브리엘 신부의 비무장한 상태에서 오로지 오보에 하나로 들려주는 선율에 감동되어 그를 마을로 데리고 갑니다. 그가 처음으로 원주민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백인들이 사는 동네에서는 욕망으로 벌어지는 일들이 그려집니다. 노예사냥꾼 로드리게는 자신의 애인이 동생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동생을 살해 하고 예수회 수도원에 갇히게 됩니다. 결국 로드리게는 가브리엘 신부의 도전과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수회 선부로 원주민 마을의 선교 사역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지만 상황은 별로 좋지 않게 돌아갑니다. 정치적인 문제로 결국 원주민들의 땅을 무신론자들에게 넘겨주기로 하게 되는데 원주민들은 그에 반대해서 싸우기로 합니다. 영화는 자신들을 총과 칼로 공격해 오는 자들을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를 놓고 벌이는 가브리엘 신부와 로드리게 사이의 갈등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선교사들이 과라니라고 하는 부족에게 가서 헌신적으로 선교를 하는 이야기를 영화한 것으로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특히 '넬라 판타시아(Nela Fantasia)'라고 하는 주제곡은 현재까지도 사람들에게 들려지는 불후의 애창곡이 되었습니다.



영화 미션에 등장하는 신부들은 원주민들 속에 들어가 자신들이 전혀 모르는 언어와 문화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곳에 가서 정착하며 수 십 년을 함께 지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에게서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제가 이런 한 단어가 가지는 원래의 의미에 집착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서로가 다른 의미를 사용한다면 제대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선교사와 제가 생각하는 선교사가 다르다면 이 글 자체가 갖는 의미는 매우 축소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제가 지나치리만큼 원래의 의미에 집착하려고 하는 것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사도 바울은 엄밀하게 미시오로서의 선교사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문화를 전혀 모르는 곳으로 간 것이 아니라 이미 헬라 문화가 널리 퍼져있었던 로마제국 안에서만 활동했습니다. 그는 새롭게 언어를 배운 것이 아니라 이미 잘 알고 있었던 헬라어로 사역을 했습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에 나타난 미시오들과 사도 바울의 공통점이 있으며 사도 바울의 사역 속에서 많은 미시오들이 사역의 원리를 배우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선교사로 부르는 것에는 동의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미시오들과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도 문화가 다른 곳에 가서 타문화 사역을 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