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선교

문화와 선교

문화와 선교 44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16-10-28 23:39
조회
115
최근 이슬람 사역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보다 과감한 상황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듣기에 따라서는 너무 위험한 발상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다. 예를 들어 상황화를 통해서 이슬람 사회 안에서 그들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믿는 자들의 공동체를 만들려고 하는 시도들이다. 대표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C6의 스케일로 설명을 하기도 한다.



C1은 매우 서구적인 교회의 모습이다. 반면 C6는 거의 이슬람 신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극단적으로 상황화된 신자들의 공동체다. 이렇게 극단적인 C1과 C6사이에 상황화의 정도가 다른 여러 가지 신자들의 공동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을 한번 도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위의 그림 참조)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C4와 C5사이다. C5부터는 이슬람에서 기독교로의 개종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물론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모두 예수의 제자 (혹은 꾸란이 말하는 식으로 아사 알 마시를 따르는 자들)이라는 정체성은 분명하다. 하지만 마치 이슬람 사원과 같은 형식의 예배, 아니 더 나가서 심지어는 이슬람 사원에 가서 예배하는 것까지도 허용하는 상황화의 경우도 생각하고 있다.



이를 두고 찬반이 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런 형태가 윤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신분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 라고 질문한다. 또한 잘못하면 혼합주의가 된다고 걱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용인하려는 사람들의 입장도 분명하다.



용인하려는 사람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유대적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헬라인들에게 그들의 프레임 안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게 했다는 것이 매우 극단적인 상황화였다는 것이다. 만약 그 당시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교회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겠느냐고 묻는다. 실지로 AD 70년에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유대인 배경의 기독교 공동체는 급격하게 약화된다.



보수적인 상황화를 주장하는 사람은 극단적인 상황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도를 넘었다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극단적인 상황화를 주장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선교사들이 너무 조심하는 나머지 가야할 만큼 제대로 가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