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라비안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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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라비안 나이트 15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16-10-28 22:53
조회
45
3장: 서울의 밤



낯선 고향



인도네시아를 처음 방문하는 한국 손님들이 하는 말은 인도네시아의 밤이 너무 어둡다는 것이었다. 특히 우리가 살았던 족자는 더욱 어두웠고, 교수 사택이 있었던 스뚜란의 밤은 말 그대로 칠흑이었다. 그 어두운 밤도 나름 좋은 면이 있었는데, 그것은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낭만도 있었다. 다위와 호세와 집에서 조금 떨어진 논에 가서 반딧불이를 잡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의 밤이 너무 어둡다는 말은 반대로 한국의 밤, 특히 우리가 살게 된 서울, 그 중에서도 잠실의 밤은 너무나도 환했다. 처음 한국에 와서 가장 익숙하지 않은 것은 밤 11시에 잠실 사거리가 차로 뒤엉켜 있다는 것. 밤에 수퍼에 갔는데, 쇼핑을 나온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 거기에 아이들까지 자지 않고 함께 나왔다는 점... 서울의 밤은 거의 실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낯선 것이 어디 그것뿐이랴. 물가도 달랐다. 하기야 물가는 우리가 처음 안식년을 맞은 1994년부터 놀라운 일이었다. 과일 가게에 가서 자두를 보았다. 1990년 한국을 떠난 이후 처음보는 자두였다. 주인에게 물었다. “자두는 어떻게 하나요?” 주인은 아무렇지 않게 “일곱 개요.”라고 대답했다. 얼마에 일곱 개란 말인가. 확인을 하고 싶어서 다시 물었다. “백 원에요?” 주인은 어이없다는 듯이 “천 원에요”라고 대답했다. 천 원이면 인도네시아에서는 자두 보다 맛있는 람부탄을 1킬로 그람이나 살 수 있었다. 자두 일곱 개는 200 그람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데... 기가 막힌 것은 우리였는데, 주인이 더 기가 막혀한다.



그로부터 7년 후 다시 돌아온 한국의 물가는 더 올랐다. 더욱이 잠실은 한국 내에서도 물가가 비싼 곳이었다. 머리를 깎아도 인도네시아에서는 거의 반 년 동안 머리를 깎을 돈으로 한 번 머리를 깎아야 했다.



다음으로 느낀 역문화 충격은 속도였다. 한국은 모든 것이 빨랐다. 지하철도 어찌나 빨리 문이 열리고 닫히는지. 교통수단의 빠르기는 통신의 빠르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족자에 있는 동안 우리집에는 전화도 없었다. 학생들에게 뭔가를 전달하려면 오토바이를 타고 학생들이 있는 하숙집으로 찾아가야했다. 전화로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만나서 하는 커뮤니케이션은 거의 사라졌다. 이제는 모든 것이 모두 이메일로 이루어졌다.



족자에 전화가 나온 것은 96년이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제 신석기 시대를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다음 해인 97년 OMF 수련회에 갔을 때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OMF 모든 멤버들이 이메일 주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수련회에서 이제 신석기 시대에서 거의 벗어난 사람에게 전자 기기를 사용하라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메일을 인도네시아에서 내가 주고받던 일반 편지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메일이 와도 천천히 열어 보았고, 본 후에도 얼른 답신을 하지 않고 며칠 뒤에 하곤 했다. 그러나 메일을 보낸 사람은 이틀을 참지 못했다. 전화를 해서 메일을 받았느냐고, 답신은 언제할 것이냐고 묻곤 했다. 나는 메일 속에 파묻혀서 사는 것 같았다. 답신을 보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답신에 다시 회신을 하고 그 회신에 다시 회신을 하고 이렇게 이메일 속에서 사는 삶으로 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