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라비안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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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라비안 나이트 16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16-10-28 22:53
조회
41
그 가운데서도 정말 달라진 것은 한국의 경제적 사정이었다.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무한 경쟁으로 말미암아 가진 사람들은 더 갖게 되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것마저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이 안주하는 직장이나 일터는 없다는 없다는 냉정한 현실을 보게 되었다. 그러한 경제적 사정의 변화는 후원자들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대학생 시절에 피터 에프 드러커가 쓴 ‘단절의 시대’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는 서구 사회를 중심으로 해서 1945년을 매우 중요한 해로 지목했다. 그 해는 제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구 사회의 변화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드러커가 지적하는 변화란 1945년을 기점으로 해서 지식 노동자의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전까지는 육체적으로 건강한 노동자들이 공장에 가서 자신의 판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즉 지시받은 대로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1945년 이후 노동자들은 자신의 판단과 책임 하에서 모든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야 1945년에 새롭게 시작을 한 나라이니 피터 에프 드러커가 말하는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이에 준하는 변화는 있었다.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1997년의 금융 위기였다. 나는 그 변화의 소용돌이를 피해서 인도네시아에 있었다. 하지만 그 변화를 약간 경험할 수는 있었다.



1996년 8월에 선교한국에 참석하는 다섯 명의 인도네시아 학생들을 인솔하고 한국에 온 적이 있었다. 그 때 우리나라는 여러 면에서 매우 풍족하게 느껴졌다. 1997년 송원교회에서 우리 가족을 모두 한국에 초청해 주었다. 그 때도 그 풍성함은 여전히 느껴졌다. 하지만 1998년 6월 두 번째 본국 사역을 위해서 한국에 왔을 때 상황은 매우 달랐다. 1997년과 1998년 사이에 바로 외환 위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작은 가게 등을 운영하는 중소 자영업자를의 타격이 컸다. 많은 중산층들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후원자들 가운데 자영업을 하던 신실한 사람이 있었다. 그 분의 삶을 옆에서 보는 것은 정말 충격 그 자체였다.



김종한 사장님은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어떤 분이었지만 우리 가족이 인도네시아에서 사역을 시작하기 시작해서부터 신실하게 헌금을 해주었다. 장안동에서 헌트 가게를 하고 있었다. 한 번도 김 사장님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도 그렇게 성실하게 우리 가족을 위해서 헌금을 보내 주신 것이 감사해서1994년 안식년으로 한국에 왔을 때 뵙고 싶어 전화를 드렸다.

“저는 손창남 선교사님입니다. 안식년으로 한국에 왔는데 한번 찾아뵈려고 하는데 언제가 좋을까요?”

그러자 아주 친절한 목소리의 김 사장님은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해주었다.

“아, 선교사님, 이렇게 전화만 해주셔도 감사합니다. 바쁘신데 굳이 여기까지 오실 필요 없습니다. 선교사님이 보내주신 기도편지 통해서 소식 잘 듣고 있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한번 가서 뵙겠다고 별렀지만 결국 김 사장님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인도네시아로 돌아갔다. 김 사장님의 후원은 계속 되었다. 1998년 안식년을 맞아 다시 우리나라에 나왔을 때도 김 사장님의 반응은 똑 같았다. 전화를 드리고 한번 뵙겠다고 했지만 김종한 사장님은 그럴 필요 없다면 굳이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바쁜 선교사를 배려해주는 마음이 정말 고맙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