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라비안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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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라비안 나이트 44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16-10-28 23:01
조회
65
7장: 지루한 싸움



2001년 10월에 한국 OMF 대표로 임명을 받았지만 실질적으로는 2000년 7월부터 대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 당시는 인도네시아를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오고가며 영어로는 NDD (한국 대표라는 뜻의 National Director라는 단어 뒤에 Designated, 우리말로 하면 임명 받은 자)라는 타이틀을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2001년 임명식을 통해서 정식 대표로 취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타이틀의 변화에 불과했다.



한국 OMF의 어려운 상황은 이미 이야기 한 바 있으니 다시 이야기 할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하지만 많은 노력을 했고, 한국 선교사들을 모아서 홈의 상황을 알리고 함께 건설해 가자고 외친 2003년의 한국 선교사 대회에서 큰 실망을 한 나는 5년 임기의 대표직이 끝나기만을 기대하고 있었다.



한국 OMF의 산적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가 않았다. 당시 한국 오엠에프의 문제에 대해서 국제본부에서 파송국의 OMF를 담당하는 부총재였던 패트릭 펑 선교사에게 보낸 간단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1. 개별 선교사들의 재정 부담이 너무 높다. 재정 부담이 줄어들도록 한국의 독자적인 재정 시스템을 허락해 달라

2. 한국 선교사님들이 필드에서 서양 선교사들과 지내면서 문화적인 차이와 영어로 어려움을 많이 겪는데 그 어려움을 줄여 달라.

3. 한국 홈 사역을 강화시켜 달라. 지금 우리 가정만이 섬기는 것은 과중한 업무를 감당하기 어렵다. 적어도 한 가정이 한국으로 돌아와 홈 사역을 함께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



하지만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렀다. 여러 가지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대부분의 시도가 의미 없는 결과로 바뀌어버린 것 같았다. 이제 2005년이 되면 임기가 끝나게 된다. 그러면 인도네시아 필드로 돌아가겠다는 것이 당시 내 생각이었다.



2004년 봄이 되었다. 국제본부로부터 MSI에서 3월에 MSI 비전 트립을 가는데 함께 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MSI는 중국에서 봉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리는 단체였다. 그 비전 트립에 여러 사람이 함께 했다. MSI의 키 리더인 레지 짱 박사가 함께 했고, 나중에 국제 OMF의 총재가 패트릭 펑, 그리고 후에 패티릭 펑을 대신해서 파송국의 OMF를 감독할 부총재가 된 카나다 출신의 존 풀러도 함께 했다.



MSI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아도 허드슨 테일러의 증손자인 테일러 박사님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테일러 박사님이 2003년에 한국에 오셔서 우리 집에서 일주일을 머물면서 한국 교회를 방문해서 MSI의 사역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알린 적이 있었다.



만약 대표로서의 임기가 끝나면 인도네시아로 돌아가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던 나에게 MSI의 비전 트립은 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비전 트립 팀이 간 지역은 세 군데였다. 운남성, 사천성, 그리고 중경이었다. 그 중에서도 우리말로는 중경이라고 하는 충칭에 갔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 대학과 대학생이 많은 것을 보고 놀랐다. 충칭에만도 30만 이상의 대학생이 있다는 것이었다. 족자와 너무 비슷한 상황이었다.



특히 중경 공상 대학에 갔을 때 총장은 적극적으로 자기 대학에 국제회계학을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다며 내가 임기가 끝나면 자기 학교에 와서 가르쳐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나는 마음이 동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아내가 중국 선교사가 되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남편의 비전을 따라서 인도네시아로 갔는데. 혹시 하나님이 이제 인도네시아가 아닌 중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뜻하지 않는 일을 만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