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라비안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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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라비안 나이트 49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16-10-28 23:02
조회
52
첫째는 내가 너무 독단적인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의 평가에 수긍이 가는 면이 많았다. 나는 특히 대표로서 몇 가지 정책에 대해서 강조를 하고 있었다. 특히 자녀들에게 한국 아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심어주라고 하는 문제, 안식년에 대해서 멤버들은 OMF의 정신이나 결정과 관계없이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를 했다..



둘째는 재정에 대해서 너무 본부 운영을 위해서 돈을 너무 많이 쓴다는 지적이었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본국 경비 가운데서 가장 높은 것은 인건비였다. 국제본부에 계속 부탁한 것은 본부에서 함께 일할 한국 선교사 한 가정을 보내달라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말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꽤나 월급을 많이 주고서 총무 한 사람을 기용한 것이다. 그 비용이 꽤 높았다.



셋째는 특정 필드에 대해서 편파적으로 사람들을 보내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도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보낸 것은 마치 불량 자동차를 판매한 회사가 나중에 리콜을 위해서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작업을 필요로 한다. 이미 방콕 포럼을 할 때 아누손이라고 하는 현지 장로님이 말씀하셨다. “태국에서 와서 언어도 못하고 문화도 모르고 태국 사람을 사랑하지도 않는 한국 선교사는 도대체 누가 데리고 가느냐?”라고.



넷째는 영어에 대해서 조금 더 실력을 높이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OMF 국제 회의에 가면, 특히 국제실행이사회에 가면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나 한 사람인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그렇게 국제회의에 가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얼굴에 철판을 깐 것처럼 뻔뻔스럽게 그 뜻을 물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오느냐고 물을지 모른다. 용기라기보다는 논리에서 나오는 것인데. 만약 내가 모르는 말을 자기들끼리만 쓰려면 나를 왜 초대했을까가 내 논리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사전을 당연히 늘 내 손에 들려 있었고, 회의 하는 동안 메모지에는 모르는 단어와 모르는 표현들을 메모해 두었다가 회의가 끝나면 가까운 사람에게 언제나 묻곤 했다.



말은 그렇게 배울 수 있다고 하지만 영어로 편지를 쓰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이메일을 영어로 쓰려면 몇 번을 생각하고 고치고 해서 보낸다. 내가 하루 종일 고민하며 써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이 5분 안에 올 때 나는 좌절하곤 했다. 더군다나 복잡한 문제에 대한 편지를 쓰는 것은 정말 어려워서 미루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하게 한 것도 많았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국제본부다 나의 어려움을 더 알게 되었고 나도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더욱 알게 되었다. 드디어 나는 2005년 6월에 5년 임기의 한국 OMF 대표로 재임명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재임명이 되었다는 사실을 국제본부에서 공지한 다음날 국제본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부총재 대행을 하고 있던 한스 선교사가 전화를 한 것이다. 한 명의 한국 선교사가 국제 본부로 이메일을 보냈는데, 자기는 한국 OMF 대표로 내가 재임명 된다면 사임을 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내 임기를 다 못 마치고 낙마하는 데에 일조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