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라비안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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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라비안 나이트 38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16-10-28 22:59
조회
61
6장: 한국 OMF 25주년:



우여곡절 속에서도 OMF 사역은 계속 진행되었다. 쉽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첫 임기를 마치고 2004년 한국 OMF 대표로서 재임명을 받으면서 어떻게 하면 한국 교회가 OMF라고 하는 단체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까는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5년을 맞게 되었다.



한국 OMF는 나름대로 정착이 되어 가고 있었지만 뭔가 더 좋은 계기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2005년은 한국 OMF가 시작된 지 25주년, 그리고 국제 OMF가 시작된 지 13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래서 25주년 특별행사를 생각했다. 그 행사 가운데 하나로 일곱 개 도시를 돌면서 선교집회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강사로 허드슨 테일러의 고손자 제이미 테일러를 초청하기로 했다.



한국 OMF의 25주년을 맞아 여는 선교집회에 제이미 테일러를 초청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허드슨 테일러와의 관련이다. OMF는 중국내지 선교회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중국 내지 선교회는 허드슨 테일러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내가 허드슨 테일러를 존경하는 것은 허드슨 테일러만이 위대한 선교사가 아니라 그 집안이 모두 훌륭한 중국 선교사였다는 것이다.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리라.”

이것이 허드슨 테일러의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가훈이라고 들었다. 허드슨 테일러 가문을 알게 된 것은 허드슨 테일러의 증손자인 닥터 테일러를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닥터 짐 테일러



내가 처음으로 허드슨 테일러의 증손자인 닥터 짐 허드슨 테일러를 만난 것은 1988년 선교한국에서였다. 선교한국의 첫 번째 대회에서 주강사로 닥터 짐 테일러를 초청한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오엠에프 선교사로 허입과정을 밟고 있던 터라 오엠에프 국제 총재이며, 중국내지 선교회를 설립한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의 증손의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정말 큰 영광이었다. 첫 번째로 열린 선교한국의 주강사로서 손색이 없는 설교를 통해서 그의 삶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후 그와 다시 만난 것은 선교한국 88대회로부터 2년 뒤인 1990년 10월 싱가폴의 오엠에프 국제 본부에서였다. 나는 가족과 함께 초임 선교사들을 위한 7주간의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고 있었고, 그는 당시 10년간의 OMF 국제총재 생활의 마지막 임기를 그곳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나는 싱가로프의 국제본부에 머무는 동안 그를 더욱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오리엔테이션의 강의와 매주 있었던 기도모임에서의 설교를 통해 그의 삶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지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강의실에서뿐만 아니라 가끔 일과가 끝난 오후 늦게 배구 코트에서 만나기도 했다. 그는 젊은이들처럼 배구를 즐겼으며, 평상시의 근엄한 얼굴 표정에서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유머 감각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또 바쁜 가운데서도 그는 모든 초임 선교사들 한 명 한 명에게 관심을 보였다.



오엠에프의 전신인 중국내지 선교회의 창설자인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를 직접 만나 본 적이 없지만 저자인 닥터 짐 허드슨 테일러의 삶을 통해서 그의 증조부인 허드슨 테일러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닥터 테일러는 오엠에프의 총재로서 10 년의 임기를 마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수천 명의 단기 선교사들을 동원해서 지금도 아름다운 사역을 하고 있다.



중국 병법의 대가였던 손무는 손자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손자 손빈 대에 와서 어떤 면에서는 그의 병법이 완성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최근 중국 정부가 근대 중국을 위해서 공헌한 사람으로서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의 전기를 발행한 것만을 보아도 중국내지 선교회를 만들어 중국에서 사역을 했던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는 대단한 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의 사역의 위대함은 그의 후손들에 의해서 더욱 빛을 발한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