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라비안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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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라비안 나이트 39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16-10-28 22:59
조회
66
제이미 테일러의 방한



제이미와의 관계도 역시 1990년 우리 가족이 OMF 신임 선교사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을 위해서 우리 가족이 싱가포르의 국제본부에 머물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당시 33세였지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다른 신임 선교사들과 함께 잘 어울렸다. 그의 선조들이 영국 사람인 것과는 달리 그는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는 결혼을 하지 않은 노총각이었는데, 우리 아이들, 다위와 호세와 잘 놀아주었다. 영어를 잘 하지 못하던 당시인데도 다위와 호세는 엉클 제이미를 무척 따랐다.



대만에서 태어난 그는 다른 누구보다 아시아의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루는 함께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있던 아카라고 하는 형제의 생일이 되었다. 점심식사를 하는데 누구 와서 오후에는 수업도 없고 해서 점심 식사 후 싱가포르 시내에 나가서 아이스크림 파티를 하려고 하는데 갈 마음이 있느냐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따라 가기로 했다.



아이스크림 가게에 도착해서 나는 무척 당황했다. 나는 아이스크림 값을 준비해가지고 오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누군가 초청을 하는 사람이 아이스크림을 사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 우리를 초청했다고 생각하고 그저 따라온 것이다. 하지만 함께 오리엔테이션을 받는 신임선교사들은 대부분 서구에서 온 젊은이들이었는데. 이들은 각자가 아이스크림 값을 준비해가지고 온 것이다.



돈이 없다고 다시 숙소로 돌아갈 수도 없는 실정이다. 거기다 다위와 호세까지도 모두 데리고 갔다. 그렇게 난처해하는 나에게 다가와서 ‘창남, 걱정하지 마라. 내가 돈을 내줄테니’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돈을 내준 것이 바로 제이미였다.



그러던 그가 10년이 지난 후 만났을 때 중국 필드의 리더가 되어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설교를 한번 들었는데, 얼마나 파워가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를 한국 OMF 25주년을 기념해서 여는 선교집회의 강사로 초청한 것이었다.



우리는 광주를 시작으로 일곱 개의 도시를 방문하면서 선교대회를 열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광주를 필두로, 다음날은 제주, 그리고 대구, 부산, 수원, 서울,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전에서 집회를 계획했다. 나는 그 모든 도시 방문을 제이미와 함께 하기로 했다.



제이미와 내가 처음으로 방문할 도시는 광주였으므로 인천 공항에 도착한 제이미는 김포 공항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나와 함께 바로 국내 비행기로 갈아타고 광주로 내려갔다. 쉴 사이도 없었는데 그는 즐겁게 모든 일정을 따라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