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라비안 나이트

쏘라비안 나이트

쏘라비안 나이트 26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16-10-28 22:56
조회
50
1990년 대 초 족자에 처음 도착해서 아무런 사역의 기회가 없었다. 대학생들이 30만이나 되는 도시에서 소위 학생 사역자라고 자처하는 내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전도도, 양육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영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몇 명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인도네시아 JOY 모임을 우리 집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모임에 가장 필요한 것은 노랑머리의 외국 선교사였다. 인도네시아 대학생들은 영어를 할 줄 아는 아시아 사람이 아닌 영어를 할 줄 아는 서구 사람을 좋아했다.



처음에는 척 해리슨이라고 하는 미국 선교사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한 학기만 하고 그 모임이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만 두겠다고 했다. 나에게는 그 당시 외국 선교사를 JOY 모임에 초대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당시 내 심정을 표현한다면 마치 심봉사가 딸 청이를 위해서 집집마다 젖동냥을 하는 기분이었다.



마침 다위와 호세가 다니는 홈스쿨링 그룹에 친절한 미국 선교사 부인이 있었다. 수라고 하는 부인은 결혼 하기 전에는 OMF 선교사로 태국에서 사역을 하다가 안식년으로 미국에 사서 남편을 만나 선교부를 OC International로 바꾸고 사역지도 인도네시아로 바꿔서 오게 되었다. 우리가 OMF 선교사라고 하는 것 때문에 우리에게 무척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남편의 이름은 데이나였다.



내가 어느 날 수에게 나의 고민을 이야기 하자 수는 자기 남편에게 부탁해보라고 넌지시 귀끔을 해주었다. 나는 데이나를 찾아가서 우리 사정을 이야기 하고 모임에 참석해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그는 매우 귀찮다는 듯이 몇 개월 뒤에나 가능하지 지금은 어럽다는 것이다. 거절을 당했다는 것보다 그가 10명 정도 모이는 모임에 그것도 영어로 하는 모임에 초청 받는 것에 대해서 별로 탐탁하지 않게 이야기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좋지가 않았다.



데이나가 소속된 단체는 OC International이라고 하는 단체였다. 그 단체의 선교사들이 다섯 가정이나 족자에서 함께 사역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조이에 초청을 받았다. 특히 부인들은 직접적인 사역에서 대부분 소외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이에 초청을 해서 영어로 성경공부나 어떤 주제에 관한 특강을 부탁하면 정말 마다하지 않고 와서 해주었다. 하지만 데이나는 JOY 모임에 초청하지 않았다.



몇 년이 흘렀다. JOY는 하나님의 은혜로 정말 놀랍게 성장을 했다. 그리고 그곳에 오는 선교사들마다 JOY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다섯 가정의 대표격인 데이빗 헤걸버거는 내가 부탁하는 때에 만약 선약이 있으면 자기 수첩을 나에게 보여주면서 다음 달에는 가능하다고 다른 대안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감사했다. 초기에 이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이 너무나 중요했다.



JOY 모임은 놀랍도록 빠르게 성장했다. 1996년 말이 되자 금요 정기 모임에 참석하는 학생이 80명가량 되었고, 임원들만 20명 가까이 되었다. 모임이 더 커지자 임원을 중심으로 하는 현지 리더들을 훈련한 필요가 커졌다. 그래서 캠퍼스 리더들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을 계획했다. 이틀 동안 집중적인 훈련 프로그램을 매 학기 하게 되었는데, 1997년 처음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 중에 사도행전을 공부하는 데에 4시간의 시간을 할애했다. 톰 세핑턴이라고 하는 선교사에게 부탁을 했다. 톰 선교사는 기꺼이 사도행전 강의를 맡아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