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서 웃고 계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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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스뚜란의 천사 (2)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17-02-19 06:53
조회
63
이이는 우리 집에는 자주 왔던 것에 비하면 죠이에는 아주 가끔씩 나왔다. 이이는 영어를 별로 잘 하지 못했다. 그래서 영어로 조이 모임이 진행되는 것 때문에 잘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이는 믿음이 없었다. 신앙에 관래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언제나 가족처럼 나타나 도와주었다. 조이에서도 힘쓰는 일이 필요하면 언제나 나타나 도와주고 돌아갔다. 우리 가족은 이이를 천사라고 불렀다.

어느 날 이이가 우리 집에 놀러왔다가 자신이 최근 주님을 만났다고 말해 우리를 놀라게 했다. 얼마 동안 기침을 심하게 했는데 그런 와중에 우연히 티브이에서 어떤 목사님이 설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단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혹시 아픈 사람이 있으면 나와 기도하자고 했는데, 그는 목사님의 기도를 따라한 모양이다. 그랬더니 기침이 멎었다는 것이다. 이이는 오순절 계통의 목사님과 티브이를 통해 기도하는 중에 주님의 치유를 경험한 것이다. 우리는 이이가 믿음을 갖게 된 것 때문에 무척 기뻐했다. 그리고 신앙을 가진 이 후로 더 친해지게 되었다.

이이가 주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이이의 어머니가 암이 걸리셨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이는 가족 중 어머니를 가장 사랑했다.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니의 병환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물을 많이 흘렸다. 이이는 여러 번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빡 손, 왜 하나님은 내가 주님을 열심히 믿겠다고 했는데 어려움을 주시나요?”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는 것 뿐이었다. 이이에게 고린도 전서 10장 13절의 말씀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라는 말씀으로 위로를 해 주었다. 이이는 지금도 내가 적어 준 성경 구절을 가지고 다닌다고 했다.

이이 어머니가 암에 걸려서 병원에 있는 동안 우리는 그의 고향인 쁘깔롱안으로 그의 가족들을 찾아 갔다. 그리고 내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이이 어머니는 병상에서 주님을 영접했다. 이이 어머니가 주님을 영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님의 품으로 돌아 가셨다. 이이는 늘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슬퍼했다.

우리가 안식년을 마치고 다시 죡자로 갔을 때 이이는 두따와짜나 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 하고 고향으로 갔다. 그곳에서 아버지가 하던 차 공장을 돕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어머니 돌아가신 후 더 삶이 나빠졌다고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가 휴가를 위해서 자카르타에 있는 동안 이이의 아버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갑자기 온 소식에 놀랐지만 어머니를 잃은 지 만 2년 만에 아버지를 잃은 이이의 슬픔을 생각하고 그를 위로해 주기 위해서 무조건 쁘깔롱안으로 달려갔다.

당시만 해도 인도네시아 장례 문화를 잘 몰랐다. 무슬림들은 24시간 내에 시신을 묻었다. 하지만 이이는 무슬림도 아니고 화교기 때문에 화교들이 하는 장례식을 따라했다. 나는 내가 도착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발인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갈아입을 옷도 변변히 챙겨가지 못했다. 그런데 가서 알게 된 것은 이이의 형제들이 전 세계에 흩어 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형제들이 올 때까지 장례식을 미루기로 했단다. 어떤 형제는 대만에서 어떤 형제는 심지어 미국에서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틀을 이이와 함께 지내고 나서 저녁 버스로 자카르타로 떠나겠다고 말했다. 이이는 내가 발인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하루만 더 묵고 가기를 바랐는데 그것은 그 다음날 목사님이 오셔서 온 가족이 다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내가 그 예배에 참석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가족들을 자카르타에 남겨두고 왔기 때문에 사실은 하루라도 빨리 자카르타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왕 쁘깔롱안까지 왔는데, 이이를 가능한 한 즐겁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에 비행기고 가기로 했다. 비행기의 가격은 버스의 거의 다섯 배에 해당하는 것이다. 나는 이이를 위로하기 위해서 그 정도의 비용을 지불할 만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