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선교

문화와 선교

문화와 선교 50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16-10-28 23:40
조회
75
딸의 웃음



필자가 인도네시아에 간 것은 단순히 회계학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회계학을 가리치는 동안 만나는 대학생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싶었다. 족자카르타 안에는 대학이 100개나 있었고 대학생의 수는 30만 명이나 되었고, 필자가 있던 캠퍼스 내에만도 7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어가 제대로 되지 않고 문화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 어떤 방법으로 적절하게 복음을 전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세무대학 교수로 있는 동안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적용해 보려고 했지만 진전은 없었다. 세무대학에 있을 때 눈여겨 봐둔 학생을 연구실로 불러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하다가 인생을 목적을 물어보곤 했다. 학생들이 자기의 목표를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나는 늘 이런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러면, 그런 목표에 도달했을 때 진짜 행복해질까?”



대부분의 학생들은 출세와 성공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지만 행복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내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런 학생들에게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많은 학생들이 주님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이런 시도는 그렇게 효과가 없었다. 문제는 학생들에게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을 수는 있는데 학생들이 유창한 인도네시아어로 자기 인생의 목적을 이야기 하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화는 시작했지만 끝내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결국 회계학을 가르치는 데만 전념하려고 했다. 사역은 접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자 마음이 그런대로 편해졌다. 하지만 그 기간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어느 날 한 주일 동안의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점심을 먹는데 딸아이가 막웃었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

딸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우리는 웃기는 가족 같다. 선교사로 인도네시아에 왔는데 전도도 안 하고 맛있는 것만 먹고 놀러만 다닌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딸아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선교지로 오기 전 세무대학 교수로 있을 때 우리집은 늘 청년들이 넘치는 곳이었다. 학생들이 우리 집에 와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성경공부를 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아파트의 아주머니들은 늘 내 직업에 대해서 궁금해 했다. 그러다가 우리딸에게 누군가가 물었나보다.

“아빠 어디 다녀?”

“우리 아빠는 학교에 가서 성경공부해요.”

딸아이의 대답을 들은 이웃들은 모두 내가 신학생이며 어느 교회 청년부 전도사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 딸아이가 아빠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인상이었다. 그래서 선교사로 인도네시아에 가면 아빠가 하던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집에 대학생들이 오지 않았다.



딸아이가 그렇게 웃어도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