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선교

문화와 선교

문화와 선교 56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16-10-28 23:41
조회
86
11. 선교사란



선교사의 역할

선교지에 가는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원리를 생각하며 갈 것이다. 하지만 선교지 사람들은 선교사들에 대해서 나름의 기대를 갖는다.



200년 전 인도에 간 영국 선교사들을 현지인들은 도라라고 불렀다. 도라란 지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영국 선교사들이 넒은 땅을 사서 큰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대부분의 인도 지주들은 부인 외에 첩을 데리고 살았는데 선교사들도 첩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즉 싱글 선교사들이 함께 살았던 것이다. 당시는 영국도 결혼을 하지 않은 딸이 해외에 나가서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따라서 선교회에서는 이미 결혼한 가정에 싱글 선교사들이 함께 살도록 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현지인들에게 오해를 가져다주었다.



현지인들은 선교사를 제국주의자들처럼 생각했다. 대부분 식민지 정부의 공무원들은 교육을 많이 받았고 현지 문화를 무시했다. 선교사들의 모습도 그들처럼 비쳐지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의 글은 김명호 작가가 쓴 글의 일부다.



● 중국인의 눈에 비친 서구 선교사의 모습



1840년, 영국의 대포와 아편이 중국을 능욕했다. 미국·프랑스 등이 뒤를 이었다. 청나라 정부는 서구 열강이 내민 불평등 조약 문서에 군말 없이 서명했다. 조문마다 선교의 보장과 교회 건립, 선교사 보호에 관한 조항은 빠지는 법이 없었다. 1850년대 말, 프랑스와 맺은 조약에 “외국 선교사들은 중국 전역에서 토지를 빌리거나 구입할 수 있고, 무슨 건물이건 지을 수 있다”는 조문이 있을 정도였다.



교회는 중국의 법률이 미치지 못했다. 치외법권 지역이나 매한가지였다. 선교사들은 외교사절이 부럽지 않았다. 면책특권 등 온갖 혜택을 누렸다. 십자가만 내걸면 아무리 흉악한 사건을 일으켜도 시비를 따지는 사람이 없었다. 청나라 정부는 이들을 수수방관했다. 국력이 약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중국에 와 있던 외국인 선교사 중에는 형편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토지 몰수는 기본이었다. 부녀자 겁탈 정도는 사건 축에 들지도 못했다. 직접 찾아와서 누구네 집 딸이 예쁘다고 알려주는 중국인들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세상에 이런 별천지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