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선교

문화와 선교

문화와 선교 57

작성자
손창남
작성일
2016-10-28 23:42
조회
88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중국은 철저히 패배했다. 대청제국은 점점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이 넓은 땅덩어리, 들고 갈 것도 아니고 빈 땅에 교회를 짓건 말건 내버려둬라.” 교회는 외국인들의 활동거점으로 둔갑했다.



전국 방방곡곡에 4000여 개의 교회건물이 올라갔다. 산둥(山東)지역에만 1300여 개가 있었다. 먼 옛날 황건적의 발상지라며 두려워하는 선교사들도 있었다. 한 영국인 선교사가 런던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중국은 우리가 생각지도 않았던 곳까지 외국의 선교사와 상인, 학자들에게 개방시켰다. 이 나라는 완전히 우리 수중에 떨어진 거나 다름없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중국인들의 농토를 점령하고, 평생 눌러앉을 생각을 한다면 엄청난 죄를 저질러야 한다. 언제 무슨 난리가 일어날지 모른다. 생각만 해도 무섭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하늘은 우리를 돌보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때는 무력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외국 선교사들의 횡포가 극에 달했지만 정부는 무능했다. 현실은 사람을 변화시켰다. 냉가슴을 앓던 미국 감리교 선교사 쑹자수(宋嘉樹·송가수)는 혁명파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멸망시키지 않는 한 중국은 희망이 없었다.



중국의 하늘(天)은 서양의 하늘과 뜻이 달랐던지 창장(長江) 유역에서 서양종교 배척운동이 벌어졌다. “서양귀신 내쫓자”는 전단들이 도시의 대로와 골목을 수놓았다. 시도 때도 없이 교회 창문에 돌덩이가 날아들었다. 선교사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에 뿌려진 인분 냄새에 코를 싸맸다. 밖에 나왔다가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머리통을 싸매고 돌아오는 선교사들이 속출했다. 화염에 휩싸이는 교회가 한둘 생겨났다. 외국인들은 공포에 떨었다. 중국인 신자들은 “서양귀신 믿었다가 큰일 나겠다”며 교회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쑹자수는 1개월간 현지 조사에 나섰다. “원인은 간단했다. 단테의 말이 맞았다. 권력은 사람을 부패시킨다”고 일기에 적었다. (계속)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82>”



아마 위의 경우는 선교사에 대한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많이 있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나는 한국에 있던 어떤 여자 선교사가 늘 회초리를 들고 다니는 사진을 보았다. 자기에게 가까이 오는 사람들을 쫓기 위해서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다는 설명을 듣고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현지의 기대



어떤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역에서 선교사는 이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만약 사람들이 불쌍해서 경제적 도움을 주다가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철수 할 경우에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들은 그 동안 선교사가 도움을 준 것에 고마워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경제활동이 어려워 진 것 때문에 선교사를 원망할 가능성이 높다.